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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턴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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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턴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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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5월 출간된 [운명의 턴넬](대한기독교서회 간) 50년만의 복간판(復刊版)!

일제강점기 함경도 지방의 경제, 인물, 기독교의 유입과 전파, 형제애와 사랑,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가진 한 가족의 놀라운 실제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겪었던 일본유학, 학도병으로 강제징집, 혹독했던 일본군훈련과정, 해방 전후의 일본군생활 그리고 제1기 카투사로서의 한국전 참전, 압록강까지의 진격과 함흥철수작전 등등의 이야기는 저자가 책의 제목을 ‘운명의 터널’이라 제(題)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히로시마 원자폭탄 경험자들의 이야기는 사료적 가치 또한 뚜렷합니다.

쌍둥이로 태어난 저자의 형제는 일생을 같이 지낼 것을 믿었으나 운명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인 저자는 일제 강점기에 학도병으로 끌려났다가 하마터면 히로시마에서 원자탄을 맞을 뻔 하였고, 해방 후 이북에 남았던 형은 6.25가 터지면서 행방불명되었다. 결국 월남한 저자만 건재하다. 이 일에 관련된 일과 저자가 학도병으로서 일본군대에 입영하여 히로시마, 도쿄공습하의 공병학교, 평양부대시절에 당한 일들과 또 한국동란 때 UN군의 일원으로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돌아오면서 겪었던 일들을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그 고난을 어떻게 이기려고 노력했던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며 또 히로시마부대에 같이 입영했던 학병동지들의 원자탄에 맞은 실록을 쓴 것이 바로 이 책의 내용이다.
Language한국어
Release dateNov 26, 2018
ISBN979119500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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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k preview

    운명의 턴넬 - 김형차

    일러두기

    * 원본은 1968년 5월에 대한기독교서에서 출간한 한글본을 말한다.

    * 복간판의 표현은 현재의 한글 맞춤법을 따랐다. 표현상 필요한 경우에는 원본을 유지했다.

    * 띄어쓰기도 현재의 한글 맞춤법을 따랐다.

    * 불필요한 한자는 한글로 바꾸었으며 의미상 필요한 곳은 한자를 병기하였다.

    * 일본 지명과 이름(名)은 「 」으로 표기하였다.

    * 외래어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랐다.

    —새롭게 추가한 것

    * 각주와 지도는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추가하였다.

    * 일본지명(地名)은 한자를 병기하였다.

    * 일본말은 일본어를 병기하였다.

    추천사

    이 책은 187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한 가족이 3대에 걸쳐 경험했던 놀라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 자신과 부모, 형제, 자녀들이 그 격동과 혼돈의 시대에 함께 또는 각기 운명의 터널을 지나온 이야기는 어떠한 소설이나 드라마보다 더 깊고 생생한 감동을 준다.

    그 시기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사건들로 점철되었다. 현재를 잘 알려면 과거를 잘 알아야 한다. 일제의 조선 침략과 병탄, 식민 통치와 해방, 한국전쟁과 전후의 정치사회적 혼란 등의 큰 역사적 흐름은 이 땅의 현재가 왜 이러한지를 큰 틀에서 설명해 준다. 그러나 대관소찰(大觀小察)이라 하듯 그 시대의 민초들의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전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역사학에서 거대사와 함께 미시사(微視史)가 중시되며 이 책에 나오는 가족사와 개인사는 소중한 사료적 가치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저자의 부친이 어떻게 장사를 배워 독립적으로 사업을 벌이고 좌절과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했는지를 읽으면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의 경제체계에 관한 이해를 넓히게 된다. 그가 어떻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켰는가에 관한 이야기는 유쾌한 재미도 주지만 한국 기독교의 초기 역사의 일면을 엿보게 해준다. 저자가 동경 유학중 학도병 참전이 ‘허용’되어 (실상은 물론 강제 징병이었지만) 장교후보 교육을 받으면서 겪은 여러 가지 일화들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일본제국 군대가 얼마나 ‘여유 있게’ 후보생의 교육훈련을 시켰는지 알려 준다. 또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저자의 지인이 보고 겪은 실상은 묵시록적인 공상과학 영화의 장면처럼 끔찍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서로 도우면서 대오를 유지하려 했다는 이야기에서 핵무기의 파괴력도 절대적이고 무한대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후 역사의 막이 바뀌어 해방이 되었을 때 저자의 가족이 월남하는 과정을 보면 당시 들어서고 있었던 북한 공산체제에 대하여 소도시나 시골 동네 주민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가장 극적인 마지막 부분에서는 저자가 어떻게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는지를 통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는 카투사(KATUSA: 미육군에 대한 한국군 증원부대)의 연원을 추적하게 된다. 또한 저자가 압록강까지의 진군에 참여한 소회와 흥남철수작전에서 가족을 남하시킨 이야기는 전쟁상황도에 나타나지 않은 전투작전의 이면을 보게 해 준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특정 시대사의 속살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훨씬 더 보편적이고 심오한 인간의 ‘운명’에 관하여 성찰하게 해 준다는 데 있다. 누구나 말년에 자신의 굴곡진 삶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그 어떤 운명의 정교한 기획에 의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저자와 그의 가족이 보고 겪은 사건들과 그 가운데 만나게 된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어떤 기막힌 인연으로 연결되는지를 읽어가다 보면 희미한 우연이 ‘운명의 터널’을 지나면서 어느새 명백한 필연으로 변화되어 있음에 놀라게 된다. 또 한 가지 이 책에서 얻게 되는 감동으로서 가족의 모험과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남북한과 일본을 몇 번씩 오가는 길고도 위험한 여정은 긴장과 감동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을 기초로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어도 좋은 작품이 나오리라 생각한다. 우선은 『운명의 턴넬』이 처음 출간된 지 50년이 지난 오늘날 새로운 모습으로 재출간된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다. 의미와 재미를 함께 지닌 책은 시대와 세대를 넘어 읽혀져야 한다.

    _문장렬, 국방대학교 교수

    서문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다소 다른 반생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서,

    1. 내가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다소 다른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2. 나는 일제 말기에 학도병으로 끌려나갔었고, 또 한국동란 때에도 역시 참전하여 압록강까지 갔다 왔다는 것.

    3. 나는 기독교인이었으므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가급적 신앙적인 해석으로써 그 고비를 이겨나가려고 노력했다는 것.

    이상 세 가지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나는 문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책을 쓸 자격도 없고, 또 써보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러나 나는 무역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관계상 한 달에도 몇 차례씩 미국인, 구라파인, 혹은 일본 사람들을 대하게 된다. 그들과 식사라도 나누면서 환담을 가질 때면, 나는 그들로부터 종종 이런 질문을 받곤 했다.

    당신은 2차대전과 한국동란 때 어떻게 지났으며 또 어떻게 살아냈는가?

    그들로서는 실로 궁금하게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나는 그 두 전쟁 동안에 겪었던 일들의 일부를 대충 들려주게 된다. 그럴 경우, 그네들은 대단히 흥미 있게 들어줄 뿐만 아니라 그런 귀한 이야기를 왜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는가, 글로 남기어서 다른 사람들도 아는 게 좋지 않은가하고 충고를 해주고 했다. 그리하여 만용인지는 모르나 이것을 하나의 기록으로 남겨볼까하고 생각한 것이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은 어떤 문학적인 작품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수난사(受難史)에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또 체험한 것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여기 『운명의 턴넬』이라고 제(題)한 것은 내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반생을 돌이켜 보면, 나의 자의에 의하여 행동한 것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때로는 그와 반대로 타의에 의하여 행동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 나 자신은 그러한 길을 걷고 싶지 않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에 서 있었다. 개인적으로나 민족사적으로 그러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운명적인 인생길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길이야말로 흡사 터널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터널이란 원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목적지에 이르려면 때로는 싫어도 터널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그것을 피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참고 견디어 터널 속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그 밖은 밝은 햇빛과 신선한 공기, 때로는 훌륭한 경치까지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예수를 믿게 된 것과 또 나의 경우에 있어서는 일제시대의 학도병 생활, 그리고 한국동란의 참전 등이 꼭 운명의 터널같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 길들은 내가 원하였거나 즐겨 선택한 길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주어진 대로 받아 참고 견디고 극복했으므로 나로서는 얻은 것이 참으로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의 예로서 한국동란 때 북한에 버림받고 있던 형의 가족을 극적으로 구출할 수가 있었다.

    이런 것들이 내가 이 책에서 말하려는 내용인 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나의 아버지와 내가 二代에 걸쳐서 당한 일들을 기록한 이 책의 내용은 우리 민족 수난사의 축소판의 일부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나 혹은 앞으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빈약한 책이 다소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다행으로 생각하겠다. 그리고 내 형님의 가족을 함흥에서 구출하여 이남으로 데려올 때 절대적 역할을 해준, 우리 가정의 은인인 당시 미 제7사단의 색클 상사*의 미국 주소를 찾는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 당시 색클 상사의 소속은 아래와 같다.

    *Schacle 상사 후일담은 후기에 있음.

    SGT, SCHACLE

    HQ Co. 49TH ARTILLERY BATTALION

    U.S. 7TH DIVITION

    1968년 5월 6일 저자 識

    1 문패를 달면서

    오늘이 있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저 일제강점기(日帝 強占期)와 감격의 8ㆍ15와 또 6ㆍ25의 수난을 거쳐 오늘에 이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또 나대로의 특이한 사정, 나만이 겪어야 했던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그 때문에 나의 경험은 보다 인상 깊은 것으로, 누구나 흔히 겪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지난 세월 겪은 갖가지 일들을 회상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1964년 11월 28일은 무척이나 감회 깊은 날이었다. 이날, 서울 신교동에 소재한 경복교회에서는 김웅정(金雄楨) 부부의 결혼식이 있었다. 이 새로운 부부를 축복하기 위해 모인 기백 명의 하객들 속에는 미국인 하사관들도 몇 사람 끼어 있었다. 그들은 신랑 김웅정이 과거 미8군에 카투사 병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사귄 친구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6ㆍ25동란 당시 전지(戰地)에서 기거를 같이하면서 형제와 같이 친근히 지냈던 미 7사단의 색클 상사를 생각하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색클 상사! 나는 결코 그를 잊을 수 없으리라.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나간 내 생애에 있어서 음으로 양으로 나를 도와주었던 사람들, 그러기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들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색클 상사의 은공은 실로 지대했다. 내 지나간 생애 중에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저 복된 부부는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숱한 하객 속에 둘러싸여 있는 김웅정 부부를 보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깊은 감회에 빠져들었다. 6ㆍ25의, 8ㆍ15의, 그리고 더 고통스러웠던 일제의 그 날을. 그리고 이제는 생사를 알 길 없는 형님의 일을······.

    예식 중에 양가를 대표하여 인사말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기어이 이런 말을 해버렸다.

    오늘, 우리가 이 복된 결혼식을 거행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몹시도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여러분께서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오늘 이 기쁜 자리에 신랑의 부모님이 계시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신랑의 아버지 되시는 사람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저 이북 하늘 아래에서 무한한 고통을 겪으시다가, 6ㆍ25가 터지던 날 새벽 세시에 그 사람들에게 납치당한 채 끝내 행방불명이 되셨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랑의 아버지를 보시지 못하셨거나, 다시 보기를 원하시는 분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저의 얼굴을 보아 주십시오. 저는 그분과 꼭 같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얼굴은 바로 그분의 얼굴입니다······.

    나는 이어서 피난 올 때의 그 참담했던 때의 도움과 오늘의 축하에 대해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 다음,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좌중의 침울한 분위기를 느끼고, 다소 미안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이런 날, 이런 좌석에서 그 이야기를 할 게 뭐냐, 하는 후회 비슷한 감정이었다. 여러 고향친지의 얼굴을 대하게 되니, 자연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나는 곧 생각을 고쳐 가졌다.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쓰라린 경험을 했을 것이었다. 따라서 이런 자리에서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또 그것으로 하여 다 같이 쓰라린 경험을 맛보았던 사람들끼리 사랑과 동정의 분위기를 다시 한번 일깨웠을 수도 있다고 자위했다.

    제 삼일은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리고 또, 새집에 드는 날이며,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날이며, 새 문패를 다는 날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이제 비로소 의젓이 성가(成家)를 하는 날이었다. 따라서 기실 결혼식을 올리던 날보다도 더 즐거운 날인 셈이었다.

    신랑과 신부가 오기 전에 우선 큰아버지들 집에 흩어져 있던 신랑의 동생들을 한 집에 모아 각기 방을 하나씩 배정해 주었다. 아직은 가구도 변변치 않은 그 텅 빈 새집이 그리 좋을 것도 없건만, 형수와 언니가 생겼고, 또 이제야 제방이 생겼다고 한껏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은, 신랑보다도 신부보다도 더 환하게 빛나 보였다. 신랑의 즐거움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들 남매들을 LㆍSㆍT*에 싣고서 사선(死線)을 넘어오던 때를 생각하고 나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그때 그들은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들 훌륭히 자라 20대의 건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암담하던 날, 어찌 이런 행복한 날을 바랄 수가 있었겠는가.

    *Landing Ship, Tank의 약자. 원래 탱크수송선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에 동원된 수송선을 말한다.

    실로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나는 김웅정의 문패를 달았다. 그것을 달면서, 내가 두드리는 망치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저 아득한 옛날로 빠져듦을 느꼈다. 그때 내 아버님이 못질하시던 소리······.

    나는 아버님이 내 문패를, 그리고 형님의 문패를 손수 달아 주시던 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나는 결코 잊지 않는다. 아니,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다. 1936년 5월 6일 이날은 음력 4월 8일로서 아버님의 회갑이 되시던 날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날을 택해 막내인 우리 쌍둥이 형제가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 이날의 잔치는 꽤 거창한 것이었다. 우리 집안에서 마지막 경사였고, 또 함흥에서도 소문난 쌍둥이 잔치여서 그럴 수밖에 없었었다.

    이날을 위해 아버님은 일본으로부터 피아노를 한 대 사들였다. 그리고는 그 피아노로 우리 쌍둥이 형제를 위해 웨딩마치를 처음으로 치게 한 다음, 그대로 교회에 기증하셨다. 또 한편 우리는 쌍둥이의 같음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곤 했다. 똑같은 얼굴 모습은 갑자기 바꿀 도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옷의 색깔만은 서로 달리하기로 하고, 형은 누런 빛깔을, 나는 푸른 빛깔을 택해 입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집은 똑같은 구조에,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빛깔로, 그도 대문을 나란히 하고 지어졌다. 그래서 나란히 이웃하고 서 있는 그 두 채의 집은 흡사, 우리 쌍둥이 형제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버님이 손수 쓰신 문패를 달아 주셨다. 김형태와 김형차라 쓰인 문패였다. <태>와 <차>의 다름뿐, 그 문패마저도 똑같은 크기의 꼭 같은 필체였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 닮은 쌍둥이였다. 그렇게 서로 닮은 얼굴로, 서로 닮은 이웃에서, 서로 닮은 문패를 달고서 한평생을 살아가리라고, 우리는 물론 다들 그렇게 믿고 빌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호사스러운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땅의, 더군다나 시련의 시기에 태어난 우리에게는 너무나 꿈같은 소망이었는지도 진정 모를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실로 기구한 수난이 우리의 행복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한다.

    2 나라 없는 병사兵士

    1943년 8월,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 전문부 법과에 재학 중일 때였다. 「뉴기니New Guinea」의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날로 어려워가던 어느 날, 소위 일본학생동원령이라는 것이 내려졌다. 그것은 전국의 전문학교나 대학교에 재학 중인 일본인 학생은 전원 입대하라는 내용이었다. 라디오와 지상을 통해 이것이 발표되자 학원 캠퍼스는 어디 할 것 없이 술렁댔다. 흡사 벌집을 쑤신듯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학생들의 징집은 보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달카날 전투(the Battle of Guadalcanal, 전역戰役이라고도 한다)는 뉴기니 우측 솔로몬제도 남부에 위치하며, 이 전투 이후로 태평양에서 일본이 수세로 돌아선다. 일본 제국에 대한 연합군의 첫 번째 대규모 공세였다.

    일본이 한국을 탈 없이(그야말로 힘들이지 않고) 집어삼켰고, 청일전쟁, 노일전쟁에서 연전연승으로 그 넓은 만주벌판까지 뻗어 나간 기세로 대담하게 터뜨린 태평양전쟁이 초기에 우세를 보이던 동안은 입을 모아 찬사를 보내던 일본 학생들도 느닷없는 이 동원령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호화롭던 찬사와 전쟁의 이유를 정당화시키던 말들은 맥없이 수그러져 버리고, 다들 우울하고 침통한 표정만 지었다.

    그러나 달리 어쩔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동원령에 따라 일본 학생들은 마지못해 끌려나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기울기 시작한 전세라 그런 상황 속에서는 불평불만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으니 다들 묵묵히 끌려나갔다. 그들을 위해, 뒤에 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장행회(壯行會) 따위를 열어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우리는 입대하는 일본인 동창생들을 위하여 「신주쿠(新宿)」에서 장행회를 가졌다. 그들은 시종 침통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내 처지를 다행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라 없는 식민지 학생의 설움은 사라지고, 그 때문에 병역의무가 없는 자신이 행운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몇몇 친구(일본인)가 나를 보고 그런 말을 솔직히 했고, 그들 모두가 동감했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백성, 즉 나라 없는 백성이기에 병역의무가 없는 다행함······. 나는 서글픈 심정으로 침울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문득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1942년 가을이었다. 당시 대학의 야외군사훈련 차 나는 「지바켄(千葉県) 나라시노(習志野)」에 있는 병사(兵舍)에서 일 주일간 유숙하면서 전투훈련을 받았다.

    그때 우리가 훈련을 받는 바로 옆에는 지나전선*에 나갈 일본초년병들이 전투훈련을 받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그들의 훈련광경을 보고 있던 나는 중좌였던 「이찌가와」 교관에게, 저들의 훈련 정도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어보았다.

    *지나(支那). 중국. 중일 전쟁(中日戰爭)은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사이의 전쟁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국항일전쟁, 일본에서는 일중전쟁 혹은 지나사변, 서양에서는 제2차 중일전쟁이라고 부른다. 중일전쟁은 20세기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찌가와」 교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 군인들은 초년병들이므로 훈련도 아주 서투르다. 저 정도의 훈련 상태로 실전에 나가면 위험률이 무척 많고 따라서 희생자도 많이 나게 마련이다. 지나전선에 나가려면 보병은 우선 다리 힘이 강하여 잘 걸어야 한다. 만일 잘 걷지 못하여 행군할 때 따라오지 못하면 처음엔 동료들의 도움을 받지만 끝내 낙오하게 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왜냐하면, 낙오병의 종말은 뻔한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 낙오하여 헤매다 보면 출몰하는 적에게 포로가 될 것이며, 그들의 모진 취조 때문에 별수 없이 아군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게 되고 그러고도 끝내는 피살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아군의 손으로 죽여 버리는 것이 정보의 누설을 막는 방법이기도 하고, 또 본인의 죽음을 확인하는 방법도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여 일행 중에 낙오자가 생길 경우에는 아군의 손으로 목을 잘라버린다. 그리고는 손가락만 하나 잘라서 유골 상자에 보관하고 시체는 장작더미 위에 올려 불을 질러버린다. 그 앞에서 일동은 그 전우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받들어총을 한 다음 다시 행군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찌가와」 교관이, 이것이 지나전선의 현실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밥맛이 떨어지는 듯했었다. 군인이라는 직업은 실로 정이 떨어지는 직업이요, 또 나 자신은 한국인이므로, 일본 군인이 될 수 없음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급생으로 지내오던 이 친구들이 이제 입대하게 되었으니 장차 「이찌가와」 교관이 말하던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까 몹시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0월로 들어서자 뜻밖에 한국 학생들도 입대하라는 동원령*이 내려졌다. 나는 당황했다. 무엇보다도 가족이 걱정되었다. 혼자 몸이어도 이 느닷없는 동원령에는 당황했을 터인데, 나는 가족까지 데리고 이국땅에 와 있는 몸이었으니 입대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반도인 학도 특별지원병제’. 1943년 10월. 줄여 ‘학병’이라 칭한다. 총 4,385명이 입대했다.

    목숨을 내걸고라도 떳떳하게 싸움터로 나갈 수 있는 조국이 있었더라면 차라리 주저함이 덜했을 것이다. 가족을 걱정하기 전에 조국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며 따라서 입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가족을 내버린 채 입대할 만한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누구를 위해 총을 들 것인가. 일본을 위해선가, 아니면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선가.

    그보다는 차라리 내 가족을 지키는 편이 더 보람된 일이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이 난을 피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의지할 곳 없는 가족을 이국땅에다 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었으며, 또 나 자신도 일본 땅에서 피해 다닐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차표를 사기 위해 동경역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것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가 바로 관부연락선* 「곤론마루」**가 미국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어 선객이 고스란히 수장된 사건이 일어난 직후여서 바닷길이 몹시 불안했고, 따라서 관부연락선이 종전처럼 정기적으로 운행될 수가 없었다. 배편이 그러하기 때문에 조선이나 만주에 갈 사람들은 한국인 일본인 할 것 없이 숱하게 밀려 동경역은 언제나 붐비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이 역 대합실에 줄지어 앉은 채 차표를 사기 위해 몇 날 며칠이고 차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판국이었다.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은 대한민국의 부산(釜山)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 하관)를 왕복하는 국제 여객선이다.

    **1943년 10월 5일, 관부연락선 곤론마루(崑崙丸)호가 미국잠수함에 의해 폭침된 사건. 580여 명이 사망했으며 그중 90%가 조선인이었다.

    그런 사정이고 보니 나라고 하여 달리 신통한 방법이 있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그들 틈바구니에 끼어 선 채로 먹고 자고 하면서 3일 만에야 겨우 표를 살 수 있었다. 그 표는 현해탄*을 건너 원산까지 갈 수 있었다.

    *대마도와 후쿠오카 사이 해협. ‘켄카이나다’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玄海灘’이다(일본 측에서는 ‘玄界灘’이라고 더 즐겨 부른다). 대한해협(쓰시마해협)전체로 오기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도 그렇다. 24쪽 지도참조.

    마침내 험준한 현해탄을 건너게 되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어둡기만 했다. 또 다소는 불안하기도 했다. 당시 현해탄 일대에는 미국의 잠수함들이 자주 출몰했고 또 해상엔 비행기들이 역시 은익(銀翼)을 번득이며 나타났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통에 현해탄을 오가는 연락선들은 잠잠할 때를 골라 부정기적으로 운행되고 있었고, 그 덕분에 동경에서 표를 사기 위해 연 사흘 동안이나 톡톡히 고생하기도 했다.

    경성(서울)을 지나 원산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나의 셋째 형과 넷째 형이 살고 계셨다. 얼마간 그 형님댁에 숨어 동정을 엿보았으나, 학도병 색출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당국의 눈을 피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한번은 형님과 함께 시가지를 걷다가 형사인 듯한 사내로부터, 가슴이 선뜩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는 우리를 붙잡고 모(某) 씨의 집을 아느냐고 느닷없이 물었다. 그 모 씨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학생으로서 나와 마찬가지로 학도병으로 끌려나갈 몸이었다. 그래서 그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전보다도 더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이 좁은 원산 바닥에서는 도저히 그들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피해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위험은 바로 눈앞에까지 다가온 듯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던 나머지 나는 보다 넓은 만주로 피신하기로 결심했다. 그곳이라면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다니기가 더 쉬울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만주 길림성* 교하에는 나의 처가가 있었다. 이토록 위급한 때에 그것은 참으로 다행한 사실이었다. 나는 가족을 데리고 즉시 원산을 떠나 그곳으로 향했다.

    *吉林省, 지린성. 중국 만주에 있는 성으로 성도(省都)는 장춘(長春).

    만주는 역시 넓은 땅이다. 따라서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는 다소 손쉬운 일일 것 같았다. 어떻게 하든지 그 넓은 만주까지만 가버리면 그들도 나를 찾아내지는 못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은 자꾸만 조급해지고 기차의 속력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내가 탄 차가 함경북도 남양에서 우리나라와 만주의 국경인 두만강을 건널 때 일본 헌병과 형사들의 검문을 받게 되어 나는 몹시 긴장하였으나 그것도 다행히 넘길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국경을 무사히 넘었을 때 내 기분은 마치 염라대왕의 집 대문을 벗어난 듯했다.

    길림성 교하의 처가에 숨어서 얼마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은 그 넓은 만주 벌판으로 달아난 나를 지극히 간단한 방법으로 끌어냈다. 그 방법이란 이러하다.

    어느 날 둘째 형이 고향에서 교하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당시 큰 형은 고향의 면장이었고 또 경방단* 단장직에 있었으며, 둘째 형은 극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방유지면서 사업가인 셈이었다. 이 점은 일제 당국에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을 재빨리 눈치챈 관헌은 매일같이 형들을 찾아와 나를 내놓으라고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그들을 등지고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던 시대였다. 나로 인하여 형들은 물론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사업까지도 위협을 받게 되었으며, 여러 친지가 말할 수 없는 시달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치안을 강화하기 위하여 소방대와 방호단을 통합한 단체로 말기로 갈수록 동향파악과 전시동원사업에 이용되었다. 농촌 면단위까지 조직되었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의 눈이 아무리 날카롭다고 해도 기를 쓰고 피해 다닌다면 나 하나쯤은 거뜬히 피해낼 수가 있긴 하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 때문에 형님들과 여러 친지가 겪을 고통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닐 것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던 나머지 내게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따라가 보기로 작정했다. 그 운명이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는 실로 불안한 노릇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 때문에 친지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쉽게 해결될 것이었다. 이 점은 형들도 이미 내 문제를 두고 백방으로 의논한 끝에 얻은 결론이었으며, 그 때문에 둘째 형이 나를 찾아 교하까지 온 것이었다.

    나는 가족을 데리고 함흥에 돌아오는 즉시로 일본군 병사부에 학병신고를 하고 말았다. 한국인 학생 동원령이 내린 이후 여러 곳을 피해 다니던 끝에 나는 마침내 나라 없는 병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라없는 병사’의 길 동경>시모노세키>부산>경성>원산>길림성 교하>함흥

    3 만장輓章 같은 장행축하壯行祝賀의 깃발

    그해 12월 초에 신체검사를 받은 후 우리 학병 일동은 12월 하순에 서울 동숭동에 있는 경성제국대학교 교사에서 1주일간의 예비훈련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미리 일본군 정신을 다소간이라도 주입시키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월 20일에 용산에 입대하려고 19일에 함흥역을 떠나게 되었다.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찬바람 부는 영하의 계절에 함흥을 떠나게 된 셈이었다. 출정 군인의 예에 따라 그 저주스러운 일장기를 가슴에 메고 만장 같은 장행축하의 깃발 속을 헤치며 대기하고 있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가 아마 오후 1시쯤이었으리라. 대한(大寒) 때인 만큼 그 지방의 날씨는 갠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독히 추웠었다. 나는 플랫폼에 늘어서 있는 환송객들을 훑어보았다. 흰 천에 먹글씨로, 축 모(某)군 입영이라 쓴 장행축하의 깃발이 찬바람 속에 무수히 나부끼는 것을 보며, 나는 그것이 흡사 만장(輓章)이라고 생각했다. 패망해 가는 일본을 위해 아무런 뜻도 없이, 그야말로 허망하게도 최후의 육탄으로 쓰러질 운명의 우리였으며, 이렇게 떠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그런 우리를 위해 저렇듯 무수히 동원된 장행 축하의 깃발이 흡사 만장같이 보임도 당연한 일이었다. 일인(日人)들로 조직된 재향군인회와 애국부인회원들이 손에 든 일장기를 흔들면서 일본 군가를 불렀다.

    "갓데 구루조도 이사마시꾸(勝って 來るぞと 勇ましく, 이겨서 용기 있게 오겠노라고)

    미요 도까이노 소라아께······데(見よ。東海の空あけて, 보라, 동해의 열린 하늘을)"

    생각해보라. 남의 나라를 위해 허망한 죽음의 길로 떠나는 우리 앞에 휘날리는 일장기와 숱한 축하의 깃발,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들 혹은 남편들을 떠나보내며 찬바람 속에 떨며 서 있는 부모 형제 처자들······. 그들 귀에는 그 일본 군가가 어떤 의미로 들렸겠는가.

    너무나 찬 날씨였다. 나는 승강구에 매달린 채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플랫폼에 늘어서 있는 군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떨고 있었다. 나는 그들 속에서 웅크리고 서 있는 내 가족들을 내다보았다. 아내의 비통한 얼굴, 그리고 곁에 파랗게 질려 있는 어린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더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꼈다. 나는 아직 호흡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 눈에는 죽은 사람과 다름없이 여겨졌을 것이었다. 이렇게 끌려나가는 날이면 결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살아서 호흡은 하고 있을망정 산송장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기에 떠나보내는 그들에게는 더 괴로운 일일 것이었다. 내가 죽었다면, 그래서 이토록 찬 날씨에 저 만장같이 휘날리는 무수한 깃발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이 환송회가 차라리 장례식이었다면, 그들은 쉽게 체념을 했을 것이며 따라서 생이별하는 고통은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었다.

    마침내 벨이 울렸다. 기차는 플랫폼을 서서히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던 환송객들과 떠나는 사람들의 착잡한 심경은 이제 한순간에 더 흥분되어 손을 흔드는 사람, 외치는 사람, 차창을 두드리는 사람, 일장기를 휘두르며 뭐라고 떠드는 사람 등등으로 싸늘한 겨울날의 함흥역은 금시 무언가 터져버릴 것만 같이 진동했다.

    나는 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이것이 마지막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전신이 후들후들 떨렸다. 풀썩 주저앉을 것만 같은 무릎을 가누며 승강구에 잔뜩 매달렸다. 그때 아내의 팔에 안겨 있던 세 살배기 둘째 아이가 나를 보며 마구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하고 같이 가겠다고 소리소리 쳤다. 옆에 있던 큰 아이도 함께 소리를 치며 울었다. 그 아이들을 부둥켜안으며 아내도 울고 있었다. 감정이 있었다면 땅도 울고 하늘도 울었을 것이다.

    그 정경을 보고 어떤 부인이 이렇게 물었다.

    이 아이들은 저 출정군인의 자식들인가요?

    아내가 괴롭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부인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그래도 저분은 행복하십니다. 이와 같은 자식들이 있으니까요. 세상에 왔던 흔적이라도 남겨둔 셈이 아닙니까.

    그 부인은 목멘 소리로 또 이렇게 말을 했다.

    그런데 내 자식은 그런 것조차 없이 저렇게 죽음의 길로 떠나고 있으니 부모 외에 누가 이 허망한 일을 알아주겠습니까······.

    나는 목이 메임을 느꼈다. 기차가 날카로운 기적 소리를 울리면서, 울음바다가 된 플랫폼을 나와 서서히 속력을 더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눈앞에 새로운 들판과 산들이 전개되었다. 그 모두가 눈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있었고 그 위에 찬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우리를 실은 기차는 그 속을 뚫고 서울을 향해 달려갔다.

    1월 19일, 석양이 서울의 겨울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무렵 우리는 서울역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음 날 아침까지 자유행동이 허락되었다. 나는 돈암동 조카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20일 아침 9시에 용산 교통회관에 집결하기 위하여 전차를 탔다. 그 전차 속에서 나처럼 가슴에다 일장기를 두른 학생을 한 사람 만났다. 그 학생은 길쭉한 얼굴에 서울국제대학교 모자를 단정히 쓰고 있었다. 그도 학병으로 징집되어 용산으로 나가는 길이 분명했다. 몹시도 침울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와 어떤 공동운명 같은 것을 느끼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용산 교통회관에서 우리는 제2차 신체검사를 받았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반갑지 않은 합격을 했지만, 그중에는 불합격의 행운아(?)도 여러 명 있었다. 그들은 사경(死境)에서 막 구원받은 사람과도 같았다. 불건강과 불구가 그때처럼 부럽게 생각된 적이 없었다. 그렇게 거뜬히 풀려나가는 그들을 우리는 다들 부러워했다.

    나는 일본 「히로시마(広島)」에 있는 서부 제7부대(공병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같은 부대로 가게 된 일행 13명 중에는 그날 아침, 돈암동 전차 속에서 만났던 그 서울국제대학생도 끼어 있었다. 그는 후에 「히로시마」에서 원자탄을 맞았으나 무사히 살아온 학병 동지 중의 한 사람으로서, 해방 후 해운공사 부사장직을 역임, 현재는 토지개량조합연합회 고문으로 계시는 민규식(閔圭植) 씨다.

    광경은 뒤에 자세히 기술하기로 하겠다.

    4 다시 현해탄玄海灘을 건너며

    우리 13명은 「노리모도」 특무조장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그는 우리를 인솔해 가기 위하여 「히로시마」 서부 제7부대에서 직접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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